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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명수는 조선왕조 고종임금께서 대한제국 황제로 즉위하시던 1897년 당시 궁중 선전관으로 있던 민병호 (閔竝浩)선생께서 궁중에서만 복용되던 생약의 비방을 일반 국민에까지 널리 보급 하고자 서양의학을 접목하여 개발한 우리나라 최초의 신약이며, 양약(洋藥)이다.
활명수를 개발한 민병호 선생과 아들인 민강 선생은 1897년 활명수를 대중화 시키기 위해 서울 순화동 5번지에 동화약방 (1962년 동화약품으로 상호변경)을 설립하였다. 활명수는 127년간 한국인의 소화제로써 굳건히 자리잡고 있다.
일제 치하, 국가의 독립을 위해 국내와 국외를 연결하는 비밀 행정기관인 서울 연통부(聯通府)를 현 동화약품 순화동 본사에 설치하고 활명수를 판매한 금액의 일부로 독립자금을 조달해 임시정부에 전달했다. 이를 기념하고자 서울시에서는 1995년 현재 동화약품 자리에 연통부 기념비를 세웠다.
1996년 한국기네스협회로 부터 국내 최고의 제조회사, 최고의 제약회사, 최초의 등록상표(부채표), 최초의 등록상품(활명수) 4개 부문에 걸쳐 기록을 인정하는 인증서를 받았다.
활명수는 그 오랜 역사만큼 유사 제품도 많이 등장했고, 그에 따라 치열한 생존 경쟁을 벌였다. 1910년대에도 활명회생수(活命回生水), 활명액(活命液), 생명수(生命水) 등 60여종의 유사 제품이 난립했으며, 1990년대까지도 활명수의 유명세를 등에 업고 유사품들이 우후죽순 생겨났다.하지만 1990년대부터 '부채표가 없는 것은 활명수가 아닙니다' 라는 부채표 캠페인으로 브랜드차별화에 나서며 소비자들의 신뢰를 강화함과 동시에 소화제의 대표브랜드로서의 입지를 더욱 확고히 다져 대한민국 국민이면 활명수를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가 되었다.
지금까지 까스활명수는 약 85억병 이상이 판매되었으며 이 수치는 전세계 인구 약 65억명이 1병 이상을 마시고 남을 수량이며 대한민국 국민 4,800만명이 1인당 175병씩 마실 수 있는 수량입니다.
까스활명수 병 높이는 12cm 입니다. 지금까지 판매량을 기준으로 까스활명수 병을 가로로 눕혀 길이를 재보면 지구를 25바퀴 돌고도 남는 길이로 활명수의 판매량이 엄청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생명을 살리는 물' 이라는 뜻의 활명수는 아선약, 육계, 정향, 현호색, 육두구, 건강, 창출, 진피, 후박, 고추틴크, 엘멘톨의 11가지 생약성분으로 제조, 소화불량, 식욕감퇴, 위부팽만감, 과식, 식체, 구역, 구토 등에 탁월한 효능을 발휘하면서 4세대에 걸쳐 우리 국민들의 사랑을 받아온 소화제의 대명사입니다.
1910년대 60ml 활명수 1병의 값은 50전으로 설렁탕 2그릇에 막걸리 2~3잔을 사먹을 수 있는 수준의 비싼 가격이었습니다. 현재는 대중화되고 보편화된 가격으로 판매되고 있지만, 1910년대에는 활명수가 상당히 귀한 제품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